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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그리스는 오는 유월 남아공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우리 한국팀이 처음으로 상대하여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하는 국가이다. 또 그리스는 지금 전세계 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유로 경제위기를 촉발시킨 반갑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

70년대 후반 나는 지중해에 위치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아테네 근교 피레우스항에서 열리는 국제 해운조선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그리스는 리바노스를 비롯하여 거물급 선주들이 전세계 해상권을 거머쥐고 있었고, 이들이 한국 조선소에 대형 유조선 등을 대거 발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는 한국 조선소에게는 가장 큰 고객이었으므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이곳에서 개최된 국제 전시회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박람회 기간 동안 난 열심히 회사를 홍보하였고 저녁마다 각 대사관과 호텔에서 개최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이름있는 선주들과 해운사 중역들을 만나 명함을 주고 받았다.

만족스럽게 박람회를 마친 후 나는 그 동안 쌓였던 긴장과 피로를 풀기 위해 우리 회사 아테네지점장과 함께 아테네인근 에에게해안에 위치한 해수욕장에 갔다. 비너스를 닮아서 일까? 늘씬한 비키니 아가씨들이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고, 지중해의 부드러운 바닷물이 피로에 쌓였던 우리들을 애무해주었다. 가끔씩 대형 초호화 유람선들이 해안을 지나갔다. 나는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와서 꼭 저 유람선을 한번 타보겠다고 다짐했다.

해가 저물고 붐비던 해수욕장에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전의 약속을 생각하며 택시정류장으로 갔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이곳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고, 꼭 다시 오겠다며 왕복택시비를 받아간 택시운전사는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저녁 무렵 그곳에서 다른 택시를 잡기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하고 인근을 지나가던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버스가 잠시 정차하더니 큰 왕파 한 단을 손에 쥔 그리스 농부가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앉아있는 버스 뒤쪽으로 왔다. 나는 일어나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젊은이들의 기본적인 예의였으니까. 그는 큰 눈을 더 크게 뜨면서 복잡한 버스 안에서 의외로 예의 바른 아시아 젊은이들을 만나게 된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나는 “꼬레아”에서 왔다고 얘기했다. 이 순간 이 그리스 농부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라며 소리쳤다. “꼬레아?”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오른손을 허공에 굴리면서 외쳤다. “서울 꼬레아, 인천 꼬레아, 부산 꼬레아, 올 꼬레아아아…” 그러더니 그는 투박한 손으로 내 손목을 움켜쥐고 앞쪽 운전기사에게 가더니 그에게 무어라고 한참을 얘기한 다음 다시 버스 안 승객들을 향하여 계속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마도 버스 승객들에게 자기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며 이 버스 안에서 기적같이 만난 한국 젊은이인 나를 소개하는 것 같았다. 그가 “꼬레아” 라고 말할 때 마다 나는 허리 굽혀 승객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그리스 농부가 30여 년전 젊었을 때 한국전에 참가하여 서울ㆍ인천ㆍ부산 등지를 다니며 전쟁을 경험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참담하게 파괴되었던 한국을 기억하며 살아왔는데 오늘 이 버스 안에서 바로 그 한국에서 온 젊은이를 만났으니 얼마나 감격했으랴!

그러나 나는 많은 승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이 농부를 만나 난처한 꼴을 당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나의 동료에게 눈짓을 하고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에서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는 인근 식당으로 들어갔다.

지금 우리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바로 그 유월을 맞는다. 오늘 한국은 처참했던 그 동란의 아픔을 딛고 경제대국을 이루었다. 전 세계 우리 우방국들에서 온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며 이러한 경제성장과 번영은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6.25동란 때 압록강까지 진격해서 화랑무공훈장까지 탄 나의 둘째 형님을 기억하며, 또 32년 전 그리스 에에게해변에서 아테네로 돌아오던 혼잡한 버스에서 만났던 한국전 참전용사 그리스 농부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